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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여행

나 홀로 여행 ② 히메지: 진한 국물처럼 깊었던 하루

by 나르는나른 2025. 5. 14.

여행을 계획할 때는 분명히 아침 7시에 일어나서 가볍게 운동까지 마친 후 여유롭게 조식을 즐기고 호텔을 떠나겠다는 완벽한 그림을 그렸었다. 그런데 현실은 역시 계획대로 되는 법이 없었다. 하루에 2만 5천 보씩 걸으며 온몸이 천근만근이었기에 운동은커녕 일어나기도 벅찼다.

 

더군다나 히메지에서의 일정은 1박 2일로 매우 짧았기 때문에 체크아웃 준비까지 겹쳐 더욱 정신이 없었다. 씻고, 면도하고, 머리까지 세팅한 후 급하게 캐리어에 짐을 꾸역꾸역 넣었다. 방을 한 번 더 체크하면서 두고 온 물건이 없나 신경 쓰다 보니 어느새 계획했던 조식 시간이 턱밑이었다.

 

여행 2일 차 첫 행선지에서 먹어볼 아몬드버터 토스트를 미리 맛보았다.

 

부랴부랴 식당에 도착해서 음식을 담는데, 정신없는 상황 때문인지 생각했던 것만큼 다양하게 담지 못했다. 실제 조식 뷔페는 내가 담은 것보다 두 배는 많은 종류의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런데 내 접시는 왜 이렇게 기호식품 위주로 가득 찬 건지... 지금 이 글을 쓰고있는 동안에도 내가 선택한 메뉴를 보며 잠시 아쉬움이 밀려왔다.

다음에 일본 여행을 다시 계획할 기회가 있다면, 꼭 조식만큼은 좀 더 여유를 가지고 맛보고 싶은 음식을 골고루 즐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나는 여행 2일 차 첫 행선지인 'Cafe de Muche - Himejiten'를 향했다.

'Cafe de Muche - Himejiten'는 히메지에 위치한 카페로써 1987년에 문을 연 이후, 지역 명물인 아몬드 버터 토스트의 발상지로 잘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아몬드 버터를 직접 수제로 만든다고 하며, 직접 만든 아몬드 버터를 판매도 한다고 한다.

호텔에서 나온 직후의 광경

 

히메지에서 맞이한 여행 2일 차 아침, 하늘은 비록 비가 내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빗방울이 떨어질 것처럼 먹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다. 새벽 사이 내렸던 비 때문인지 아스팔트는 촉촉이 젖어 있었다.

 

호텔에서 목적지였던 카페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도 되는 거리였다. 그냥 대충 보면 제법 먼 거리였지만, 오히려 나는 히메지의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으며 이 도시를 좀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는 것보다 그곳까지 걸어가는 과정이 더 기억에 남기도 하는 법이니까.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마시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자 어제는 보지 못했던 히메지의 또 다른 모습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혼자 여유롭게 낯선 도시를 걷는 것, 이것이야말로 혼자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생각하며, 나는 또 한 번 여행의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히메지 시내를 천천히 걷다가 우연히 작은 신사를 발견했다. 처음에는 평범한 주택가 사이에 있어서 그런지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돌로 된 작은 토리이가 내 시선을 붙잡았다.

 

호기심에 ChatGPT를 통해 이 신사에 대해 대충 알아보니, 이곳은 지역을 수호하는 신을 모시는 일종의 마을 신사라고 한다. 자세히 어떤 신을 모시는지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본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 깊숙이 자리 잡은 이러한 작은 신사들을 보며 그들의 섬세한 신앙 생활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큰 신사보다 오히려 이런 작고 소박한 신사가 사람들의 진심 어린 마음을 담고 있는 것 같아 더 정감이 갔다.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고, 여행 중에 이런 소소한 발견을 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페를 향해 걷던 중, 익숙한 로고와 깔끔한 외관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바로 스타벅스였다. 차분한 색상과 모던한 디자인 덕분인지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지면서도, 묘하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일본을 여행하면서 이런 정적이고 차분한 분위기의 건물들이 마음에 들었다. 화려하거나 지나치게 눈에 띄려고 하지 않고, 그냥 자연스럽게 주변 환경과 함께 녹아들어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깔끔하게 정돈된 주차장과 여유롭게 세워진 차량들마저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듯했다.

 

걷고 걸어 드디어 목표로 했던 카페에 도착했다.

카페 입구의 빈티지한 느낌이 물씬 나는 간판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과하게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 그 간판 덕분인지 카페가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평일 아침 9시경이라 비교적 한산할 줄 알았는데, 예상과는 달리 이미 꽤 많은 차들이 주차장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이렇게 사람들이 찾는 걸 보니 분명 이곳은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카페는 확실히 커피 전문점이 아닌 이상, 브런치 메뉴를 함께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덕에 음료뿐 아니라 간단한 식사까지 해결할 수 있어서 꽤 마음에 들었다.

다양한 메뉴가 있었지만, 나는 이미 '아몬드 토스트와 아이스커피'로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카페까지 걸어오는 동안 날씨가 습하기도 했고, 옷을 잘못 선택한 탓인지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내겐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모금과 이곳에서 유명하다는 아몬드 토스트 한 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얼른 주문을 마치고 테이블 위에 메뉴가 놓이기만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주문한 메뉴 중 아이스커피가 먼저 나왔는데, 주문 후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렸다. 조금 기다림 끝에 나온 커피를 보고 순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커피가 일반적인 유리잔이 아닌 맥주잔에 담겨 나온 것이다. 이건 확실히 신박한 발상이었다.

 

기분 탓인지, 맥주잔에 담겨 있어서인지 몰라도 왠지 커피가 더 차갑게 느껴졌다. 한 모금 마시자 중배전 정도로 적당히 로스팅된 커피 특유의 고소하고 깊은 풍미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커피와 함께 제공된 작은 용기 두 개는 각각 크림과 시럽이었다. 평소엔 블랙커피를 즐기는 편이지만 궁금해서 시럽을 반쯤 넣어봤는데, 딱 한 모금 마셔보고는 너무 달아서 깜짝 놀랐다. 내 입맛에는 시럽을 넣더라도 1/3 정도만 넣는 것이 적당할 듯했다.

 

이제 천천히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기대하고 있는 아몬드 버터 토스트를 기다렸다.

 

드디어 고대하던 아몬드 버터 토스트가 나왔다. 그런데 테이블 위에 놓인 토스트를 보고 먼저 그 두께에 살짝 놀랐다. 예상보다 두툼한 식빵 세 조각이 듬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접시 위에서는 온화하면서도 달콤한 아몬드 버터의 향기와 구운 빵 특유의 고소한 향이 부드럽게 올라와 코를 자극했다. 동시에 옆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아이스커피의 향까지 더해지니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처음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제공되지 않아 잠시 당황했는데(원래 주지 않는것같다), 자리에 앉았을 때 직원이 호출할 수 있는 벨을 줬던 덕에 편하게 요청할 수 있었다.

 

드디어 토스트를 한 입 먹어보니, 맛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달콤한 아몬드 버터의 향이 입 안에 기분 좋게 퍼지면서도, 분명히 처음 경험하는 낯선 풍미였다.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내게는 완전히 새로운 맛이었다.

 

카페에서 판매하는 아몬드 버터를 구매해 여행이 끝난 후 집에서 식빵에 발라먹어봤는데, 빵의 두께가 너무 두껍지 않은 편이 개인적으로는 더 맛있게 느껴졌다.

 

카페까지 약 30분 동안 쉬지 않고 걸어온 탓에 몸이 다소 지쳤었는데, 이곳에서 맛있는 음식과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자 금세 체력이 회복되었다. 또 가게 내부는 냉방을 하고 있어 시원했고, 땀으로 젖었던 몸도 금방 보송보송하게 돌아왔다.

이제 적당히 휴식도 했으니 다시 다음 목적지인 '쇼샤산 엔교지 사원'을 향하는 버스를 탑승하기 위해 카페 근처 버스 승강장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버스에서 하차하면 쇼샤산 로프웨이 매표소 및 승차장이 바로 보인다.
대충 15분 간격으로 로프웨이가 운행된다는 뜻인듯

 

쇼샤산 엔교지 사원으로 가기 위해 로프웨이 매표소에서 왕복 티켓을 끊었다. 배차 간격이 길지 않은 덕분에 금방 로프웨이를 탈 수 있었다.

 

이때가 오전 11시쯤이었는데, 날씨가 흐리고 비까지 내리기 시작해서인지 생각보다 탑승객은 많지 않았다. 쇼샤산 엔교지 사원도 분명 히메지 관광지 TOP5 안에 드는 유명한 명소인데, 사람들 대부분이 히메지에서 하루 정도만 머물면서 히메지성과 코코엔 정원 위주로 다녀가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나는 여유 있게 로프웨이에 탑승했고, 이제 곧 펼쳐질 쇼샤산 엔교지 사원의 풍경을 기대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로프웨이 하차 장소
하차 직후 광경(쇼샤산 엔교지 사원 입구)
「一隅を照らす — "한 구석을 비추다"」

 

「一隅を照らす」이 문구는 일본 불교, 특히 '천태종(天台宗)'과 관련이 깊은 말이라고 한다. 

 

"한 구석을 비추다"라는 뜻으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주변을 밝히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세상을 전부 바꾸려고 하기보다는 각자가 서 있는 위치에서 작은 빛이 되어 세상을 밝히자는 철학이라고 한다.

 

살다 보면 주변인들 중에 열등감에 사로잡히거나 자신의 위치에 걸맞지 않게 무언가에 집착하며 바라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나는 늘 “자기 위치에 맞게 사는 것이 행복이다”라고 생각해왔기에, 이 말의 의미가 더욱 깊게 와닿았다.

「言葉のちから 愛がある — "말의 힘, 사랑이 있다"」

 

「言葉のちから 愛がある」이 문구는 엔교지가 위치한 히메지시에서 진행한 지역 문화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 캠페인은 말(언어)의 긍정적인 힘과 따뜻한 표현이 사람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철학 아래, 지역 곳곳에 감동적인 문구를 비석 형태로 설치하는 프로젝트였다고 한다.

 

"한 구석을 비추다"라는 뜻으로, 말에는 힘이 있고, 그 안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말의 중요성과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강조하며, 따뜻한 마음과 배려를 담아 말하자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특히 불교 사찰이라는 점에서, "말의 힘"과 "사랑"은 '자비(慈悲)'와 '말업(言業)'에 대한 불교적 가르침과도 깊게 연결된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정어(正語, 바른 말)'를 팔정도 중 하나로 강조하며, 말이 사람을 살릴 수도, 해칠 수도 있다고 본다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에는 힘이 있고, 그 안에 사랑이 있다" 이 문구는 자비심을 담은 언어의 실천을 권유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입구 길을 따라 조금만 걷다 보면 곧 셔틀버스 매표소가 보인다. 쇼샤산 정상까지는 걸어서 편도 20~30분 정도 소요되는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긴 했지만,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망설이지 않고 왕복 티켓을 끊었다. 여행 중에는 체력을 아끼는 게 현명하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으로 배웠으니까.

셔틀버스 하차 직후 광경 -1-
셔틀버스 하차 직후 광경 -2-
엔교지 사무소 입구
사무소 본관으로 추정
사무소 내에 조성된 전통 일본식 정원

 

비가 오고있는 탓에 이끼가 가득한 바닥이 사찰의 고요함을 더해주었고, 일본 전통 정원 양식에서 수행자의 내면 성찰의 여정을 상징하기도 한다는 돌다리의 조화가 인상깊었다.

 

이곳에 온 나는 마치 자신이 사무라이가 되기 위해 수행을 하러 온 수련자가 된 느낌이었다.

마니덴(摩尼殿) - 쇼샤산 엔교지의 가장 상징적인 건물

 

사무소에서 벗어나서 조금 걷다보니 드디어 엔교지의 중심 법당인 '마니덴(摩尼殿)'이 나타났다. 짙은 녹음에 둘러싸인 채 안개 속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그 모습이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신비로웠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마니덴은 서기 970년(헤이안 시대)에 건립된 법당으로, 엔교지에서 가장 성스러운 공간이자 참배자들이 불보살에게 간절히 소원을 비는 곳이라고 한다. 특히 마니덴의 ‘摩尼(마니)’라는 이름은 보석을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마니(Mani)’에서 유래한 것으로, ‘귀한 불보살의 전당’이라는 깊은 뜻을 지니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씨 덕분인지 법당의 웅장함이 더욱 돋보였다. 나는 계단 아래서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이곳의 고요하면서도 장엄한 분위기를 천천히 음미했다.

마니덴에서 벗어나 다이코도(大閣堂, 대강당)으로 이동 중
天王殿(텐노덴) - 하늘의 왕을 모시는 전각

 

마니덴에서 벗어나 10분 정도 산길을 따라 걷자, 드디어 영화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톰 크루즈가 수행을 받은 장소로 유명한 대강당(다이코도)이 눈앞에 나타났다.

 

사진에는 그 느낌이 제대로 담기지 않아 아쉽지만, 실제로는 완만한 언덕길을 오르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건물의 위압감에 순간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낮게 깔린 안개가 오래된 목조 건물들과 어우러지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유명한 장소를 실제로 마주할 때마다 느끼지만, 스크린에서 봤던 것과 직접 눈으로 보는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확실히 이곳은 화면이 담지 못한 깊은 역사와 엄숙한 기운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어머니, 저 사무라이가 될래요"

 

이렇게 쇼샤산 엔교지에서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셔틀버스를 타긴 했지만 사원 내부가 워낙 넓은 데다, 비 오는 날씨 탓에 우산까지 계속 들고 다녔더니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꽤 컸다. 슬슬 배도 고프고, 몸도 피곤해져서 확실한 에너지 보충이 절실해졌다.

 

다음 목적지는 이미 정해두었다. 히메지 시내에 위치한 유명한 ‘준도야 라멘 본점’에서 이곳의 대표 메뉴인 돈코츠 라멘을 먹으며 지친 몸을 달래기로 했다. 준도야 라멘은 일본 전역에 체인점을 운영하는 대형 라멘 프랜차이즈이다.

 

 

로프웨이 승차장으로 돌아온 뒤, 준도야 라멘 본점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 승강장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버스를 타고 내린 후에도 식당까지는 다시 15분 정도를 걸어야 했다. 오전부터 계속 걸어다닌 탓에 이미 체력은 바닥나 있었지만, 머릿속에서 진하고 뜨거운 돈코츠 라멘 한 그릇을 떠올리며 꾸역꾸역 발걸음을 옮겼다.

곳곳에 보이는 작은 사원들
준도야 라멘 본점

 

그렇게 한참을 걷고 걸어, 마침내 준도야 라멘 본점에 도착했다. 매장 앞에 걸린 붉은 등불과 일본 특유의 아기자기한 간판을 보자마자 '역시 제대로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들어가기 전부터 맛있는 라멘의 향기가 벌써부터 코끝을 자극하는 듯했다.

 

테이블 앞에 놓인 메뉴판들을 하나하나 사진으로 찍으며, 역시 나는 또 한번 ChatGPT의 도움을 빌리기로 했다. 일본어를 거의 모르니 매 번 메뉴 선택부터 난관이다. 하지만 사진만 봐도 프리미엄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메뉴가 한 눈에 들어왔다.

 

"濃厚豚骨 Revolution(농후 돈코츠 레볼루션)".

 

뭔가 심상치 않은 이름부터 '레볼루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걸 보니, 보통 메뉴는 아닐 것 같은 느낌이 확 들었다. 게다가 메뉴판에서는 이 메뉴가 가게 역사상 가장 진한 국물 농도를 자랑한다고 강조하고 있었다. 이런 문구를 보면 역시 지나칠 수가 없었다.

 

주문을 할 때 점원이 갑자기 면의 종류를 물어왔다. "일자면(호소멘)과 꼬불꼬불한 면(치지레멘) 중에 고르세요." 예상치 못한 선택지에 순간 당황했지만, 고민 끝에 깔끔한 느낌이 나는 일자면으로 주문했다. 늘 그렇듯 이런 순간의 선택들이 여행의 소소한 재미를 더해주는 법이니까.

타카나(高菜)

 

드디어 주문한 라멘이 나왔다.

사실 이제 한국에서도 라멘은 꽤 수준 높게 자리 잡은 음식이라, 나에게도 전혀 낯선 음식은 아니었다. 하지만 국물을 한 숟갈 뜨는 순간 분명히 느꼈다.

 

"아, 확실히 다르다."

 

라멘의 국물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하고 깊었다. 마치 포타주 스타일의 걸쭉하고 진한 수프처럼 농후한 국물이 입안 가득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물론 내가 선택한 메뉴 자체가 이 가게 역사상 가장 진한 국물 농도를 자랑하는 ‘농후 돈코츠 레볼루션’이긴 했지만, 한국에서 자주 먹던 돈코츠 라멘과는 확실히 감동 자체가 달랐다.

 

역시 본토에서 맛보는 라멘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맛이라면 굳이 힘들게 여기까지 걸어온 보람이 충분했다.

면의 익힘 정도 또한 완벽했다.
차슈는 짜지 않고 담백했다.

 

차슈 또한 기대 이상이었다. 간혹 어떤 라멘집에서는 장조림 맛이 날 정도로 짜고 질긴, 거친 차슈를 제공하는 곳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그런 차슈는 정말 최악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차슈는 부드럽고 잡내도 없었으며, 국물과 완벽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고기의 결 사이로 육즙이 스며들어 있어 씹을 때마다 감칠맛이 입안을 채웠다.

이 집 라멘의 퀄리티를 더 돋보이게 만드는 훌륭한 차슈였다.

 

곁들여 주문한 교자는 솔직히 특별히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어딜 가나 교자는 비슷비슷한 맛이었고, 애초에 교자라는 음식 자체가 그다지 큰 감동을 주지는 않는 음식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라멘과 함께 먹으니 적당히 입안을 정리해 주는 역할은 충분히 해냈다. 크게 인상적이진 않았지만, 그래도 라멘과의 조합 덕에 나쁘지는 않았다.

 

라멘에 맥주 한잔과 교자까지 곁들여 먹으니 배가 완전히 불러 든든했다. 적당히 쉬면서 체력도 회복되었고, 슬슬 다시 움직일 준비가 되었다.
충분히 숨을 돌렸다고 생각한 나는 다음 목적지인 '효고현립 역사박물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효고현립 역사박물관

효고현립 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사실 이곳 역사박물관과 히메지 시립미술관은 어제 관광한 히메지성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원래는 히메지성 관광 직후에 함께 방문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체력 소모가 컸던 데다 시간상으로도 여유가 없어서, 결국 오늘 자유 일정으로 일정을 조정하게 됐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애초에 여행 일정을 여유 있게 잡아두었기에, 이런 돌발 상황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늘 느끼지만, 역시 일정에는 어느 정도의 여유가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하다.

 

효고현립 역사박물관은 1층에서 티켓을 구매한 뒤 관람할 수 있고, 각 층마다 흥미로운 역사적 자료들이 곳곳에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효고현의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역사적 흐름을 전반적으로 다룬 전시가 있고, 특히 히메지성을 중심으로 발전한 중세 성곽 문화에 대한 전시도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특정 시대나 테마를 중심으로 한 특별 전시들도 마련되어 있어 역사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지루하지 않게 관람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전시되어 있는 자료들의 설명이 일본어로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관람 중 종종 전시물을 찍어 ChatGPT에게 물어보곤 했는데, 오히려 이 방식 덕분에 전시를 더 깊이 있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갑옷 사진을 찍어서 올리면, ChatGPT가 갑옷의 생김새를 분석하며 특정 부분이 왜 이렇게 생겼는지, 이 모양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또 결과적으로 이 갑옷이 어떤 용도로 사용된 갑옷인지를 상세하게 알려줬기 때문에 조금 더 감성적이고 생생하게 다가올 수 있었다.

 

이러한 경험 덕에 단순히 전시물을 눈으로만 보는 것을 넘어서, 마치 현지 전문가와 함께 박물관을 둘러보는 듯한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히메지 시립 미술관

 

다음 목적지인 히메지 시립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미술관은 조금 전에 방문했던 역사박물관에서 도보로 3분 정도의 매우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어 편하게 찾아갈 수 있었다. 미술관 건물은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멋진 외관을 자랑했다.

 

특히 붉은 벽돌 구조가 인상적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건물은 메이지 시대에 육군의 창고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라고 한다. 일본 육군이 창고로 쓰던 건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아름답고 웅장했다. 실제로 일본의 등록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 등록유형문화재라는 것은 한국의 등록문화재와 비슷한 개념으로, 역사적 또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근대 건축물 등에 부여되는 지정 방식이라고 한다.

 

미술관 내부에는 기본적으로 일본과 서양의 근대・현대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내가 방문했을 때는 특별히 명품 패션 브랜드 'KENZO'의 창립자인 고(故) 다카다 겐조의 기획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나는 개인적으로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데 큰 조예가 있거나 흥미가 있는 편은 아니라서 재미를 느끼지는 못했다. 다만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는 데서 오는 신비로움과 낯선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맛으로 미술관을 둘러보는 편이다.

이번 방문도 마찬가지였다. 솔직히 작품의 예술적 의미를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전시를 만나는 기분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

 

 

이렇게 히메지에서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해가 떨어질 무렵쯤, 다음 여행지인 오카야마로 향하는 기차에 탑승할 예정이다.

 

사실 이번 여행 첫날부터 나는 마음에 쏙 들었던 새로 산 모카신을 신고 다녔는데, 이게 생각보다 엄청난 고통이었다. 오래 걷다 보니, 마치 숙제를 안 해 갔을 때 학원 선생님에게 회초리로 발바닥을 맞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오를 만큼, 걸을 때마다 발바닥이 아팠다.

 

더 이상 이 상태로 여행을 계속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느낀 나는 기차를 타기 전에 깔창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도 역 근처에는 PIOLE라는 큰 쇼핑몰이 있었고, 일본의 대형 쇼핑몰답게 이곳에도 ABC-MART가 입점해 있었다.

 

ABC-MART에 가보니 생각보다 다양한 종류의 깔창이 있었다. 여러 제품 중 아치 서포트 기능이 있는, 적당한 두께의 깔창을 하나 골랐다.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현장에서 가위를 빌려 즉시 깔창을 신발 사이즈에 맞게 잘라 넣었다.

 

깔창을 착용하고 나니 걸을 때 발걸음이 한결 편해졌다. 물론 이미 축적된 데미지 탓에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통증이 몰려왔지만, 그래도 확실히 달라진 느낌이었다. 다음 날부터는 이 작은 투자의 효과를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내 생애 최초의 신칸센 탑승이다!

 

탑승한 열차에 '히로시마'라고 써 있었지만, 나는 중간에 오카야마에서 내릴 예정이다.
여담이지만, 내가 탑승하는 이 NOZOMI 신칸센은 곧 다가오는 일본의 대형 연휴, 골든위크 기간에는 전 좌석 예약제로만 운영된다.

짧은 구간이지만 일본 여행의 필수 경험이라는 신칸센에 처음으로 탑승하게 되어, 가슴이 조금 설렜다.
이렇게 설렘 가득했던 히메지 일정을 뒤로하고, 다음 목적지인 오카야마로 향한다.